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 외무부를 이끈 동성애자
외무부에서 보낸 40년, 사무국장과의 연애, 니콜라이 2세가 붙인 “마담”이라는 별명, 모르스카야 거리에서 당한 지팡이 공격.
목차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Vladimir Lamsdorf) 백작은 동성애자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층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지켜본 관료와 외교관, 언론인의 기록이 이를 전한다. 자신의 일기에는 성적인 고백을 남기지 않았지만, 가장 강렬한 애정의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일기에서도 드러난다.
람스도르프는 40년 동안 러시아 제국 외무부에서 일했고 1900년부터 1906년까지 외무부를 이끌었다.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준비에 참여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막으려 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지키고 도거 뱅크 사건 뒤 영국과의 전쟁을 피했다. 동성애는 그가 이 자리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외무부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는 관료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사빈스키(Alexander Savinsky)였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했고, 람스도르프는 사빈스키의 승진을 도왔으며, 동시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연인으로 여겼다.
외무부 경력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는 1845년 1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 봉직하던 발트 독일계 귀족, 곧 오스트제 귀족 출신이었다. 역사가 안톤 유리예비치 로샤코프(Anton Loshakov)에 따르면 가문은 독일 기사 오토 폰 라메스도르페(Otto von Lamesdorpe)에게서 시작되어 15세기부터 리보니아와 쿠를란트에 살았다. 가문이 백작 작위를 받은 것은 장관의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마트베이 이바노비치 람스도르프(Matvei Ivanovich Lamsdorf)는 러시아에 병합된 쿠를란트의 초대 총독이었고, 1800년 11월부터 훗날의 니콜라이 1세를 교육했다.
아버지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는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해 훗날 산림국을 이끌었고 황제 부관대장 계급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는 궁정 고위 시종관이던 형 알렉산드르와 드러나지 않는 경쟁을 벌였다. 형은 열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의 관등은 거의 나란히 올라갔다.
람스도르프는 귀족 자제를 군무와 궁정 업무에 대비시키던 특권 학교인 근위사관학교에서 배웠다. 상급생인 궁정 시종 후보생들은 황실이 공식 석상이나 연회에 나설 때 시중도 들었다. 1862년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고위 관청의 관료를 양성하던 알렉산드르 리체이, 곧 옛 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이에서 공부했다. 1866년 외무부에 들어간 뒤 평생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상주 해외 직책을 맡은 적은 없었다. 외교관이라면 으레 거치는 대사관과 공사관 근무를 건너뛰었고, 경력 전부를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 조직에서 쌓았다. 국외에는 황제의 수행원이나 협상 대표로 나갔다.
1878년 베를린 회의 때는 재상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고르차코프 곁에서 일했다. 회의가 끝난 뒤 고르차코프가 그를 개인 비서로 삼으면서 빠른 승진이 시작되었다. 1884년에는 스키에르니에비체(Skierniewice)에서 열린 알렉산드르 3세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회담을 준비했다. 이듬해에는 모라비아의 크로메르지시(Kroměříž)에서 열린 알렉산드르 3세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양자 회담을 준비했다.
외무장관 니콜라이 카를로비치 기르스는 람스도르프를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묶은 삼제동맹을 지지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뒤 베를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비밀 조약을 갱신하지 않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료들은 그를 “걸어 다니는 기록보관소”라고 불렀다. 오래된 협상의 경과와 옛 조약을 외우고 있었으며 외무부의 모든 비밀 서신을 손에 쥐었다. 외무부에서 황제에게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문서는 빠짐없이 그의 책상을 거쳤다.
1897년에는 외무차관이 되었다. 1899년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준비에도 참여했다. 각국은 이 회의에서 군비 제한과 전쟁법,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논의했다.
고르차코프와 기르스,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 공작,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 백작이 차례로 외무장관을 맡는 동안에도 람스도르프는 신임받는 참모로 남았다. 무라비요프 재임기에는 외무부의 일상 업무 상당 부분을 처리했다.
훗날 람스도르프의 후임자가 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Alexander Izvolsky)도 그의 업무 능력을 인정했다.
“근위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는 깊이 있는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주변 관료들 가운데 맨 앞줄에 설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부지런하고 겸손했으며 자기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회고록』
1893년 외무부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훗날 소련 시기 모스크바에서 회고록을 출간한 외교관 유리 야코블레비치 솔로비요프(Yuri Solovyov)는 같은 경력을 덜 호의적으로 묘사했다. 그에게 람스도르프는 무엇보다 폐쇄적인 외무부 내부 집단의 일원이었다.
“람스도르프와 그의 차관 오볼렌스키는 모두 평생을 외무부 울타리 안에서 보냈고, 전임 장관 니콜라이 카를로비치 기르스와 가까운 소수 집단에 속했다.”
— 유리 솔로비요프,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외무부에는 좀 더 우스운 이야기도 돌았고, 솔로비요프는 이것도 기록했다.
“람스도르프 백작이 출세한 데에는 반듯한 글씨와, 처음 모셨던 재상 고르차코프 공작을 위해 연필과 깃펜을 깎는 솜씨가 크게 작용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 유리 솔로비요프,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무라비요프가 1900년 6월 사망하자 람스도르프가 외무부 장관 대행이 되었다. 1901년 1월 니콜라이 2세는 그를 정식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전쟁에 반대한 장관
람스도르프가 넘겨받은 외무부에는 발칸과 극동이라는 두 위험한 전선이 있었다. 그는 두 곳 모두에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
발칸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필요한 개혁을 시행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반란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경쟁이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했다. 1902년 12월 베오그라드와 니시, 소피아, 빈을 차례로 방문했다. 세르비아 국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Aleksandar Obrenović)는 궁정을 잠시 옮겨 둔 니시에서 그를 맞았다. 람스도르프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군사 준비를 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국민이 국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년 뒤 장교들은 왕비와 함께 국왕을 살해했다.
장관 재임기의 가장 큰 갈등은 극동에서 벌어졌다. 람스도르프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그처럼 먼 곳의 군대에 보급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재무장관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와 육군장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파트킨과 함께 “베조브라조프 파벌”에 맞섰다.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 주변의 궁정 인사와 기업가들은 압록강의 삼림 벌채권을 옹호하며 니콜라이 2세를 한반도 팽창 정책으로 몰아갔다.
람스도르프는 동청철도가 지나는 만주에서 러시아의 지위를 보장받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하자고 제안했다.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민족주의 신문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 “새 시대”)의 발행인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수보린은 1900년 7월 19일, 궁정의 이견을 전한 니콜라이 일라리오노비치 스크리들로프 제독의 아내 말을 기록했다.
“황제는 일본인을 증오하며 그들을 저지하고 우위를 내주지 말라고 경고한다. 람스도르프는 일본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알렉세이 수보린이 기록한 니콜라이 스크리들로프 제독 부인의 말, 『일기』
여러 해 동안 장관과 함께 유럽을 돌아다닌 최측근 사빈스키는 람스도르프의 성격이 “매우 침착”했고 평소에는 “누구보다 다정했다”고 썼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보낸 베조브라조프와 대화할 때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베조브라조프가 외무부의 나약함과 굴복주의를 비난하자, 람스도르프는 그런 정책은 “러시아의 존엄과 양립할 수 없으며”, 황제가 자신에게 이를 실행하라고 명한다면 “이 책상에서 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며칠 뒤 황제가 직접 그 만남을 물었다. 사빈스키가 전한 대화에서 람스도르프는 복종보다 양심을 앞세웠다.
“내가 다른 모든 것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단 하나이며, 폐하께서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 “그것이 무엇인가?” — “내 양심이다. 바로 그 양심 때문에 폐하께 온전한 진실을 말씀드려야 한다.”
— 알렉산드르 사빈스키가 전한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와 니콜라이 2세의 대화, 『러시아 외교관의 회고록』
람스도르프는 왕권신수설을 믿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과 직무상 의무감이 충돌했기에 군주와 다투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1903년 니콜라이 2세는 극동 정책을 사실상 외무부 관할에서 떼어 냈다. 이즈볼스키는 훗날 람스도르프가 사임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 람스도르프 백작은 사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놀라운 이론까지 내놓았다. 러시아의 외무장관은 황제에게 해임되지 않는 한 자리를 떠날 수 없으며, 유일한 의무는 제국의 대외 문제를 검토해 황제에게 의견을 올리는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전제군주인 황제는 찬반을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은 장관에게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회고록』
그러나 사직서는 실제로 존재했다. 사빈스키는 그 내용을 옮겼다.
“이 모든 사정을 헤아려 폐하께 내 사임을 받아 주시기를 감히 청한다. 폐하의 곁을 떠나는 내 양심은 깨끗하다. 내 모든 인내와 삶 전체는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데 온전히 바쳐졌다. 훗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 알렉산드르 사빈스키가 옮긴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의 사직 청원, 『러시아 외교관의 회고록』
솔로비요프도 이를 확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극동 총독부가 설치된 뒤 람스도르프와 쿠로파트킨, 비테가 사직서를 냈지만 황제는 람스도르프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대는 짐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물러나게 될 것이다.”
— 유리 솔로비요프가 전한 니콜라이 2세의 말,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뤼순을 잃고 봉천 전투에서 패했으며 쓰시마 해전에서 함대를 잃었다. 람스도르프는 협상 방침을 준비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포츠머스 회담의 러시아 수석대표로 비테를 임명했다.
전쟁은 영국과의 두 번째 전쟁으로 번질 뻔했다. 1904년 10월 극동으로 향하던 러시아 함대는 북해 도거 뱅크 근처에서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해 포격했다. 러시아어권에서는 어선이 출항한 영국 항구 헐의 이름을 따 이 일을 “헐 사건”이라고 불렀다. 람스도르프는 국제 조사에 동의해 영국과의 전쟁을 막았다.
함대가 태평양으로 향하는 동안 제국 내부도 요동쳤다. 1905년 1월 9일 겨울궁전으로 행진하던 노동자 시위대를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뒤, 사빈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람스도르프는 니콜라이 2세에게 “가난하고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말하며 “수도에서 불과 두 걸음 떨어진 곳에 계시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사빈스키는 장관이 황제의 직접 개입을 “용감하게 요구했다”고 썼다.
니콜라이 2세는 외무부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1905년 7월 장관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핀란드만 비에르셰(Björkö)섬 인근에서 빌헬름 2세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다. 비에르셰 조약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에 어긋났다. 이즈볼스키는 장관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람스도르프 백작은 이 사실을 알고 완전히 낙담했다.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설득력을 동원해 황제에게 사태의 온갖 위험과 조약을 무효화할 즉각적인 조치가 절실하다는 점을 알리려 했다. 황제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조약의 여파를 제한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람스도르프 백작에게 전권을 주었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회고록』
람스도르프는 비테를 끌어들이고 사적인 경로로 빌헬름 2세에게 접근해 조약이 발효되지 않게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도 지켜 냈다. 1906년 러시아는 제1차 모로코 위기 때 프랑스를 지지했고, 람스도르프는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프랑스와의 동맹을 지키겠다고 재확인했다. 이즈볼스키조차 그가 “특유의 노련함과 더없이 칭찬받을 만한 활력으로” 행동했다고 인정했다.
이 모든 일화의 바탕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람스도르프는 러시아가 어느 한 강대국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런 신중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팽창주의자들을 자극했고, 독일 신문들은 그가 프랑스 동맹을 지킨다고 공격했다.
로샤코프의 분석에 따르면 람스도르프는 극도로 신중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오직 평화적 수단으로만 넓혀야 한다고 믿었고, 지나치게 원칙적이며 융통성이 부족해 베조브라조프와 극동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제독에게 극동 업무를 빼앗겼다. 일본과의 전쟁은 막지 못했지만 1876–1877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고, 발칸의 위기를 가라앉혔으며 니콜라이 2세가 프랑스와 결별하지 않도록 붙들었다. 영국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을 최대의 적수로 여겼지만 협상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즈볼스키 시대에 완성될 양국의 접근은 람스도르프 때 시작되었다.
외모와 궁정 예법
람스도르프가 협상을 벌이고 황제와 다투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장관 자신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흠잡을 데 없이 행동했다.
이즈볼스키는 람스도르프를 비테와 비교하며, 곱슬머리와 향수까지 갖춘 완벽한 궁정인의 모습을 그렸다.
“거칠고 사교계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비테와 달리, 람스도르프 백작은 가장 완벽한 궁정인의 전형이었다. 말하자면 옥좌의 계단에서 성장한 그는 여러 세대에 걸친 황실 고위 관료들에게서 옛 시대의 태도와 관념을 물려받았다.”
“키가 작고 나이에 비해 놀라울 만큼 젊어 보였으며, 밝은 적갈색 머리와 작은 콧수염을 지녔다. 언제나 세심하게 머리를 빗고 말아 올렸으며 향수를 뿌렸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회고록』

1901년 람스도르프는 자택에서 무도회 없는 야간 사교 리셉션인 “라우트”를 열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다가 훗날 한 부서를 이끈 블라디미르 보리소비치 로푸힌(Vladimir Lopukhin)은 다정한 주인이 궁정 의례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치르던 모습을 기억했다.
“……상냥하게 웃던 람스도르프 백작은 한 무리의 손님에게서 다른 무리로,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다녔다. 주요 인사들과는 잠시 멈추어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수많은 동료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힘껏 악수하고 다정하면서 거의 기쁜 듯한 미소를 선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솔로비요프는 람스도르프가 1903년 여름 페테르고프에서 쿠로파트킨을 맞을 때에도 같은 태도를 보았다고 했다.
“람스도르프 백작 특유의 달콤한 미소로 쿠로파트킨을 맞이하던 모습과 그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각하의 보고서를 즐겁게 읽었다.’”
— 유리 솔로비요프,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람스도르프는 자신의 모습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중 앞에 나서는 인물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을 당혹스럽고 성가시게 여겼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하던 비테나 이즈볼스키와 달리 기자를 피해 이 역할을 사빈스키에게 넘겼다. 언론이 쓸 수 있는 사진은 몇 장뿐이어서 여러 해 동안 되풀이해 실렸고, 사진이 없으면 실제 장관과 그리 닮지도 않은 삽화를 대신 게재했다.
역사가들은 그의 성격을 대체로 비슷하게 묘사한다. 로샤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온화함과 폐쇄성을 지적했다. 장관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피했고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할 때 당황했다. 연구자 이리나 디야코노바(Irina Dyakonova)는 고독과 어느 정도의 금욕성, 성실함, 근면함, 독실한 신앙을 꼽았다. 캐나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히멀페닝크 판 데르 오여(David Schimmelpenninck van der Oye)는 그를 뼛속까지 관료로서 직무에 매여 살며 사생활까지 희생한 사람이라고 했다. 로샤코프 자신의 결론은 좀 더 신중하다. 폐쇄성과 대중 앞에 나서는 데 대한 두려움이 “백작의 사생활과 경력에 똑같이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장관의 생활 방식
로샤코프는 1886–1896년 일기를 바탕으로 장관의 하루를 복원했다. 백작은 늦어도 여덟 시에는 일어났다. 외무부 건물 안의 관사에 살았으므로 근무일은 열한 시쯤 위층 기르스에게 올라가면서 시작되었다. 급한 사안이 있으면 기르스가 관사로 서류를 보냈다.
1890–1891년 겨울에는 한 달 남짓 아침 일정에 마사지가 더해졌다. 백작의 마사지사는 성직자들과 폭넓은 인맥이 있어 마사지 도중 신성종무원 복도에서 들은 소문을 전했다. 람스도르프는 이발사에게서도 상류사회의 소식을 들었다.
아침 식사는 외무부 동료들과 했다. 가장 자주 함께한 사람은 외무부 사무국장 발레리안 세르게예비치 오볼렌스키-넬레딘스키-멜레츠키(Valerian Obolensky-Neledinsky-Meletsky) 공작이었다. 저녁은 혼자 먹거나 다시 오볼렌스키와 먹었고, 때로는 기르스 부부와 함께했다. 장관과 그의 아내 앞에서는 새해를 함께 맞을 만큼 편안해했다.
여가에는 시내를 산책하고 상점에 들렀다. 일주일에 한 번 볼콥스키 목욕탕이나 바세이나야 거리의 목욕탕에 갔고, 여름에는 슐리셀부르크에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거나 페테르고프에서 수영하는 등 교외로 나갔다.
밤늦게까지 일했고 대개 혼자 늦은 식사를 한 뒤 잠들기 전에 일기를 썼다. 일기와 별도로 회고록도 집필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외무부 교회와 성 이사악 대성당, 카잔 대성당의 예배에 참석했고, 예배 중 장관이 부르면 불쾌한 기색을 숨기기 어려워했다. 페테르고프 인근 성 세르기우스 해안 수도원(Sergius Hermitage)의 수도사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 상대 가운데에는 1990년 “크론스타트의 성 요한”으로 시성된 크론스타트 대사제 이오안 세르기예프도 있었다. 그는 1900년 람스도르프의 장관 취임을 축하했다. 백작은 여름을 이 수도원에서 자주 보내며 수도사들과 소박한 식사를 나눴고, 1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에도 그곳에 머물렀다.
신앙은 기부로도 실천했다. “거처 없는 소녀를 위한 노동 보호소”부터 “청년의 도덕적·신체적 발달 지원 위원회”까지 네 자선단체에 가입했고, 자신의 돈으로 도움을 청한 사람들을 지원했다. 기록 보관 자료에는 15루블부터 시작하는 액수의 영수증이 남아 있다.
직무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많이 읽었다. 관보 『주르날 드 생페테르스부르』(Journal de St.-Pétersbourg)와 『정부 관보』(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ый вестник), 역사서와 회고록을 읽었다. 전 국가서기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폴롭초프(Alexander Polovtsov)가 이끄는 러시아 제국 역사학회의 회원으로서 바실리 클류쳅스키와 나란히 발표도 했다. 니콜라이 1세의 런던 방문 당시 러시아·영국 협상과, 표트르 1세의 측근들이 표트르의 개혁을 비판한 내용을 다뤘다.
취향은 흠잡을 데 없이 세련되고 값비쌌다. 신임 장관이 유럽식 새해를 맞아 1900년 12월 31일 연 라우트를 신문들은 열광적으로 묘사했다. 이국적인 식물로 꾸민 응접실, 제정 양식으로 장식한 연속된 방, 뷔페에 놓인 샴페인과 과일 펀치가 있었고 손님들은 자정이 조금 지나 돌아갔다. 집무 공간도 똑같이 꾸몄다. 1904년 8월 25일에는 궁정 보석상 파베르제에서 보석을 박은 금제 펜대, 분홍 에나멜 필통, 비취와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1루블 주화를 장식한 붉은 에나멜 국자를 합계 325루블에 샀다. 11월에는 45루블짜리 담배갑을 더했다.
은둔성과 남성에 대한 사랑
람스도르프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적법한 자녀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속한 사회에서는 눈에 띄는 일이었다. 고위 관료에게 결혼은 거의 공적인 의무였고, 고관의 사생활은 경력만큼이나 궁정의 관심사였다. 그가 결혼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신의 일기, 동료들의 증언, 궁정에서 붙은 별명이라는 세 종류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람스도르프는 수십 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일기 속 인물은 라우트에서 손님에게 미소 짓던 사람과 사뭇 다르다. 1886년 12월 12일에는 자신의 폐쇄성을 이렇게 적었다.
“[…] 그가 이 일에 관해 무슨 말을 한다면 얼버무리지 않고, 큰 곤경을 겪은 뒤 사람을 피하며 자신을 너무 깊이 닫아 버려 이제는 이겨 낼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86–1890』
1889년 2월 궁정 무도회를 앞두고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거의 육체적인 고통을 느꼈다.
“저녁에 궁정 무도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옷을 입으려고 나 자신을 크게 다그친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86–1890』
외무부 밖의 삶은 거의 상상하지 못했다. 1889년 3월 9일에는 이렇게 썼다.
“사실상 내 존재 전체를 채운 공직 생활에 관한 의심. 이 영역 밖에는 미지와 불확실성뿐이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86–1890』
1891년 4월 5일의 자기 묘사는 한층 무겁다.
“[…] 밤에 진짜 열병 발작을 겪었고, 다시 이길 수 없는 대인 공포의 발작을 느낀다. 나 자신을 향한 혐오와 수치심.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1–1892』
람스도르프는 이 수치심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낮과 저녁이 얼마나 달랐는지는 보인다. 궁정 의례를 완벽하게 수행하던 바로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에는 “나 자신을 향한 혐오와 수치심”,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심정을 적었다. 감정만 숨겨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처지에서 남성에게 끌린다는 것은 평생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한 번의 실수가 치러야 할 대가는 경력 전체였다.

람스도르프의 감정 세계는 소수의 남성으로 이루어진 좁은 관계망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만큼 애정을 품은 몇 사람을 각별히 소중히 여겼다. 일기에서 기르스를 “뜨겁게 사랑하는 상관”이라고 불렀고 1890년 말에는 이렇게 적었다.
“가을에 돌아온 뒤 사랑하는 상관이 내게 보이는 우정과 신뢰가 특히 두드러지고 감동적이다. 나는 그에게 한없이 감사한다. 그의 호의를 언제나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했다는 생각이나 언젠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찢어진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86–1890』
거의 매일 함께 아침을 먹던 오볼렌스키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 몇 년 뒤 외무부 사무국은 사빈스키가 이끌게 되지만, 람스도르프는 1900년 오볼렌스키를 외무차관으로 데려왔다. 일기에서는 그를 “나의 올라”, “나의 사랑스러운 올라”, “나의 소중한 오볼렌스키”라고 불렀다. 로샤코프가 백작의 기록 보관 자료에서 찾아낸 편지에서는 프랑스어로 Cherissime Ami, 곧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불렀다. 1891년 2월 14일에는 기르스와 오볼렌스키에 대한 사랑이 공직에 남을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나는 나의 늙은 장관을 사랑하고, 그와 헤어진다면 괴로울 것이다. 언제든 불평이나 부탁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꺼내 그를 지치게 하는 것도 내게는 큰 부담이다. 내 삶의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는 가장 소중한 오볼렌스키와 나를 이어 주는 유대이다. 내가 공직에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기쁨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와 헤어지는 일은 내게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1–1892』
1891년 3월 21일에는 그를 “내가 그토록 다정히 사랑하는 오볼렌스키”라고 했고, 1892년 일기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오볼렌스키”라고 불렀다.
오볼렌스키의 친척인 로푸힌은 공작을 전혀 다르게 보았다.
“정직하지만 편협하고 무미건조하며 인색한 […] 시야가 극도로 좁은, 규칙과 형식에 얽매인 관료.”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람스도르프가 성 세르기우스 해안 수도원에서 지냈던 바로 그 1892년 여름, 일기에는 곧 정교회 선교단과 함께 베이징으로 떠난 수도사 피멘, 표트르 그리고리예비치 시퍄긴(Pyotr Sipyagin)이 등장한다. 로샤코프는 이 대목에서 “람스도르프 백작이 폐쇄적이었다는 평과 달리 때로는 사람들과 아주 쉽게 가까워졌다”고 지적한다. 람스도르프는 그를 애칭인 페탸라고 불렀다.
“마음의 균형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몹시 어렵다. 심각한 병과 페탸와 가까워진 일, 수도원 체류와 해외여행에서 얻은 온갖 새로운 인상 때문에 이번 여름에는 일상의 흐름이 너무 급격히 달라졌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1–1892』
일기는 이 “가까워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에 람스도르프는 새 지인을 이상화했다. 피멘은 따뜻하게 맞아 준 백작에게 감사하며, 평민 출신인 자신이 백작 작위 앞에서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수도사가 된 이유는 선과 정의의 어떤 절대자를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베이징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외무부 고관을 그저 “볼로댜”라고 불렀고, 람스도르프는 그를 “페탸” 또는 “페튜샤”라고 불렀다.
2년도 지나지 않아 피멘은 베이징 선교단에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람스도르프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신성종무원 수석검찰관 대리 블라디미르 사블레르(Vladimir Sabler)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같은 시기 일기에는 로샤코프가 인용한 다음 기록이 나온다.
“1년 전이었다면 내 페튜샤가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히 행복했을 것이다. 최근 그에게서 받은 편지는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에서 시적인 장막을 모조리 걷어 냈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4–1896』
그 뒤 피멘은 아예 수도원을 떠나기로 하고 절망적인 처지를 호소하며 자살까지 입에 올렸다. 백작은 짜증을 내면서도 그를 “완전히 이성을 잃은” “가엾은 친구”로 여겨 계속 애썼다. 환속한 수도사에게 통상 따르던 권리 박탈 없이 수도 서원에서 풀려나게 했고, 자신의 부처에서 일자리까지 마련했다. 1895년 11월 9일 시퍄긴은 외무부 시험에 합격했다. 국제법 전문가 표도르 마르텐스 교수도 그의 근면함에 놀랐다. 얼마 뒤 결혼하고 바르셀로나에 부임했다.
로샤코프에 따르면 람스도르프와 가까운 사람은 적었지만 관계는 오래 이어졌고, 장기간 사적으로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는 기르스였다. 어조는 상대에 따라 달랐다. 기르스와 오볼렌스키에게는 공손하고 감상적이었지만 오랜 친구이자 친척인 헤르만 스텐보크(Herman Stenbock)에게는 장난스러웠다. 1889년 2월 8일에는 스텐보크가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지면” 기르스를 통해 만남을 성사시키겠다고 농담 삼아 장담한 말을 적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동성애자라고 불렀다
일기에는 성적인 고백이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를 알았던 세 사람, 곧 외무부 관료와 『노보예 브레먀』 발행인, 직업 외교관이 람스도르프의 동성애를 기록했다.
가장 직접적인 규정은 로푸힌이 남겼다. 외무부 수장으로 임명된 사람의 면면을 열거하면서 교육과 출신과 나란히 “성향”을 언급해 “성향상 동성애자”라고 썼다. 이 수기는 사건이 벌어진 지 20여 년이 지난 1927–1933년에 집필되었다. 하지만 로푸힌은 람스도르프 아래에서 일했고 그의 리셉션에 참석했으며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다.
“외무부 장관 대행에는 외국 주재 공관에서 근무한 적 없는 내근 관료이자, 교육 배경으로는 궁정 시종 후보생이고 성향상 동성애자이며 발트 지역 지주인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 백작이 임명된다.”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수보린은 1904년 8월 9일 같은 내용을 훨씬 거칠게 썼다. 극우 신문 『그라주다닌』(Гражданин, “시민”)의 발행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메시체르스키 공작과 관료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부르두코프가 주고받은 편지가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플레베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어 람스도르프를 아무런 완곡어법 없이 당시의 모욕어인 “남색가”라고 불렀다.
“플레베의 유품에서 메시체르스키 공작과 그의 연인 부르다코프가 주고받은 편지가 발견되었다. 황제도 그 편지를 읽었다. 황제는 이 ‘무리’를 무심히 대하고, 람스도르프 백작을 ‘마담’이라 부르며, 그의 연인 사비츠키의 궁정 관등을 올려 준다. 람스도르프는 외무부 복도에서 30년을 보냈다고 자랑한다. 그가 남색가이고 남자들이 그에게 계집이나 마찬가지라면, 유곽에서 30년을 보낸 셈이다. 유익하고 즐겁다!”
— 알렉세이 수보린, 『일기』, 1904년 8월 9일
수보린은 람스도르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공작”이라고 불리던 동성애자 메시체르스키를 같은 “무리”에 넣었다. 물론 그런 무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람스도르프는 온건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닌 군주주의자였고, 체제 수호를 내세운 보수 신문들을 못마땅해했다. 신중한 장관과 극우 논객에게 남성에 대한 이끌림 말고는 공통점이 없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견디지 못했다. 람스도르프는 일기에서 메시체르스키의 한 기사를 “외설스럽다”고 했고 공작 자신은 “혐오스럽다”고 불렀다. 그의 신문을 두고는 “『그라주다닌』에서 읽은 어리석은 글들에 분노한다”고 썼다.
수보린은 람스도르프를 직접 알았고 자택에서 맞은 적도 있지만 그런 방문을 즐기지 않았다. 1901년 3월 7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집에 장관들이 왔다. 비테, 람스도르프, 예르몰로프, 무라비요프와 국가평의회 의장 두르노보였다. 나는 그저 당황스러웠을 뿐,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 알렉세이 수보린, 『일기』, 1901년 3월 7일
수보린에게는 업무상 장관을 싫어할 이유도 있었다. 『노보예 브레먀』는 극동에서 더 강경한 정책을 요구했고, 외무부는 신문의 보도 내용을 통제하려 했다.
세 번째 증인인 외교관 솔로비요프는 같은 일을 좀 더 조심스럽게 썼다. “동성애자”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장관과 측근들의 “반자연적인 성적 기호”를 직접 언급했다. 이는 당시의 낙인찍는 표현이었다.
“람스도르프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장관의 막후 심복으로서 해외 공관 동료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했던 듯하다. 게다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람스도르프와 그의 총신들은 반자연적인 성적 기호를 지닌 이들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 유리 솔로비요프,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일기와 응접실 대화에 머무는 동안 장관의 평판은 사적인 문제였다. 1904년 5월에는 그 평판이 거리로 터져 나왔다.
돌고루키 공작의 습격
1904년 5월 람스도르프가 모르스카야 거리의 식당에서 나오던 때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돌고루키(Alexei Dolgoruky) 공작이 지팡이로 그를 공격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돌았다. 훗날 총리가 되는 사라토프 주지사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은 5월 28일 아내 올가 보리소브나에게 이렇게 썼다.
“네셀로데가 다녀갔다. 내일은 파블로프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파블로프의 말로는 알렉세이 돌고루키가 거리에서 람스도르프를 지팡이로 때렸고, 돌고루키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람스도르프가 부그르[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키던 옛 모욕어]이자 형편없는 장관이어서 때렸다고 했다.”
— 표트르 스톨리핀이 올가 스톨리피나에게 보낸 편지, 1904년 5월 28일
“부그르”는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다고 여겨진 남자를 가리키던 프랑스어의 옛 모욕어 bougre를 러시아어로 옮긴 말이다. 이 소문은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쳤다. 스톨리핀이 아내에게 파블로프의 말을 전했고, 파블로프는 다시 돌고루키가 했다는 설명을 옮겼다.
작가이자 서지학자 세르게이 루돌포비치 민츨로프(Sergei Mintslov)는 다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습격자는 “반역자”라고 외치며 전쟁의 실패를 장관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공작은 의료진의 감시를 받다가 행정명령으로 아르한겔스크에 유배되었다. 진짜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돌고루키가 범행 이유를 설명하며 썼다고 전해지는 단어를 람스도르프도 잘 알았다. 1891년 4월 26일,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이자 모스크바 총독이고 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둘러싼 궁정의 농담을 기록했다.
“도시에 새 농담 두 가지가 떠돈다. ‘지금까지 모스크바는 일곱 언덕(бугор, 부고르) 위에 서 있었지만, 이제는 한 부그르(bougre) 위에 서야 한다.’ 세르게이 대공을 빗대 하는 말이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1–1892』
람스도르프가 이런 농담을 기록한 것은 한 번뿐이 아니었다. 대공과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의 결혼에는 자녀가 없었다. 대공비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도시에 돌자 일기에는 또 하나의 농담이 등장했다.
“대공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임신을 기적으로 설명한다. 카프니스트 백작은 이를 두고 ‘무염시태’일 수밖에 없다고 심술궂게 말했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91–1892』
이 기록에는 다른 동성애자를 향한 연대가 없다. 남성에게 끌린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람스도르프는 대공을 둘러싼 도시의 가장 악의적인 농담도 거리낌 없이 옮겼다. 1889년 11월 1일에는 대공의 아내를 두고 이렇게 썼다.
“가엾은 그 여인도 비참한 남편의 지적·도덕적·육체적 비참함을 때때로 절실히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 블라디미르 람스도르프, 『일기: 1886–1890』
람스도르프와 그의 연인 사빈스키
람스도르프 곁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이름은 하나였다.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사빈스키는 1868년에 태어나 1891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20세기 초에는 1등서기관이 되었고 이어 외무부 사무국 부국장과 국장에 올랐다.

람스도르프는 사빈스키를 승진시키고 거의 어디에나 데리고 다녔다. 사빈스키는 정기적인 여행이 시작된 때를 1899년으로 적었다.
“1899년 나는 당시 장관이던 람스도르프 백작의 공식 순방을 수행할 사람으로 뽑혔다.”
— 알렉산드르 사빈스키, 『러시아 외교관의 회고록』
이 대목에서 사빈스키는 잘못 기억했다. 람스도르프가 장관이 된 것은 1900년 말에서 1901년 초에 걸쳐서였다. 나머지 연대는 들어맞는다. 실제로 사빈스키는 장관을 따라 크림과 핀란드 다도해, 유럽 각지와 발칸 협상에 갔다.
신뢰는 여행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람스도르프는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가 쓰던 개인 비밀 암호까지 사빈스키에게 맡겼다.
“니콜라이 황제는 람스도르프 백작에게 암호를 주었다. 이 일을 할 시간이 없었던 백작은 암호화와 해독을 위해 내게 암호를 맡겨도 좋을지 황제에게 청했다.”
— 알렉산드르 사빈스키, 『러시아 외교관의 회고록』
이 덕분에 사빈스키는 카이저의 전보 일부를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이 되었다. 일본이 뤼순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새벽 한 시에 도착했다. 사빈스키는 “람스도르프 백작을 깨웠고, 잠시 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봉투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고 회고했다.
역사가 로샤코프는 사빈스키를 람스도르프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 비서라고 했다. 백작 곁에서 그의 역할은 기르스 곁에서 람스도르프가 했던 역할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문서와 암호, 상관에게 온종일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같았다. “람스도르프 백작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사빈스키의 회고록을 학계에 소개하고 러시아어로 번역해 2022년 출간한 사람도 로샤코프였다.
당시 같은 외무부에서 일한 로푸힌은 두 사람을 외무부에서 날마다 함께 보이던 한 쌍으로 묘사했다. 장관은 비서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고, 리셉션에서는 안주인 대신 손님을 맞게 했다.
“람스도르프가 장관에 임명되면서 사빈스키가 외교관으로 출세할 길이 거침없이 열렸다. 이미 사무국 1등서기관이던 그는 곧 부국장이 되고, 얼마 뒤 국장이 된다.
장관은 온갖 방법으로 그를 가까이 둔다. 람스도르프와 사빈스키는 떨어지지 않는다. 장관이 라우트를 열면 사빈스키가 손님을 맞고 인사하고 배웅한다. 장관이 황제를 만나러 크림이나 핀란드 다도해에 갈 때도, 황제를 수행해 외국 군주와 공식 회담에 참석하러 해외에 갈 때도 사빈스키는 어디서나 람스도르프를 수행한다.”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로푸힌은 바로 이어서 외무부 사람들이 이 친밀함을 장관과 부하의 연애 관계로 단정했고, 사빈스키가 그 대가를 치렀다고 설명했다.
“장관에게 지극히 사적인 성격의 특별한 성향이 있었으므로 사빈스키와 람스도르프의 친밀함은 악의적인 소문을 낳는다. 소문은 널리 퍼져 사빈스키를 둘러싼 노골적인 적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몇몇 동료는 사빈스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로푸힌에 따르면 사빈스키는 “경력을 망칠 추문”을 피해야 했다. 1912년 외무장관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사조노프가 연 라우트에서 로푸힌은 이 둘을 다시 떠올리며, 사빈스키가 람스도르프 곁에서 누구의 자리를 차지했는지 보여 주었다.
“람스도르프 백작 때 이래 외무장관의 이런 라우트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눈에 띄게 호감을 준 차이는, 당시 람스도르프 백작이 언제 어디서나 내세우던 사빈스키 대신 이번에는 같은 대기실에서 사조노프와 함께 호감 가고 외모도 매력적인 부인이 손님을 맞아 인사했다는 점이었다.”
— 블라디미르 로푸힌, 『전 외무부 국장의 수기』
이 비교에서 사빈스키는 사조노프의 경우 장관 부인이 맡은 자리를 차지했다. 로푸힌 자신은 사빈스키를 싫어해 “잘생기고 처세에 능한 출세주의자”라고 불렀다.
1915년 솔로비요프는 소피아 주재 공사가 된 사빈스키를 만나 장관의 총신이라고 불렀다.
“7년 만에 소피아의 우리 공사관을 다시 찾았다. 그곳의 공사는 람스도르프 백작 재임기에 외무부 사무국장을 지낸 그의 총신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사빈스키였다.”
— 유리 솔로비요프, 『어느 외교관의 회고록: 1893–1922』
다른 대목에서 솔로비요프는 사빈스키를 옛 외무부 집단의 후원 아래 성장한 인물로 분류했다. 반면 같은 솔로비요프가 가르트비크(Hartwig)를 “람스도르프의 오른팔”이라고 부를 때에는 성적인 암시가 전혀 없었다. 장관과 가까운 사람이 모두 연인으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평판이 유독 사빈스키에게 붙었고, 기록한 사람이 누구든 그 평판은 한결같았다.
이즈볼스키는 일기에서 람스도르프와 사빈스키의 관계를 둘러싼 외무부의 이야기를 옮기고 당시의 병리화하는 표현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람스도르프 백작은 실제로 남색 행위를 하는 남색가는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1906년 일기」, 러시아 연방 국가기록보관소, 기금 559, 목록 1, 문서 86
이즈볼스키는 전임자를 싫어했고 자신의 인사 결정까지 정당화하려 했다. 다만 람스도르프와 사빈스키를 모두 직접 알았다. 로샤코프는 이런 편향을 별도로 경고했다.
“[…] 이즈볼스키의 증언을 이용할 때에는 그가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와 원만하지 못한 관계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안톤 로샤코프,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람스도르프 백작: 정치가이자 외교관』
또 다른 증인은 전직 외교관 예브게니 니콜라예비치 셸킹(Eugene de Schelking)이었다. 1903년까지 유럽 각지의 공관에서 일해 대사관 1등서기관에 오른 뒤 외무부를 떠나 언론인이 되었고, 『노보예 브레먀』에도 글을 썼다. 셸킹은 람스도르프가 젊은 남성들을 후원한 일과 그의 성적 평판을 연결했다.
“여성은 그의 삶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에게 성도착자라는 평판을 붙였다. 주변의 몇몇 남성을 대대적으로 후원함으로써 그 자신도 이런 소문에 빌미를 주었다. 그들은 대개 놀랄 만큼 잘생긴 젊은이들이었다.”
— 예브게니 셸킹, 『외교의 게임』, 134쪽; 우라니아 번역
인용문의 “성도착자”는 당시의 병리화하는 표현이다.
셸킹은 이어 사빈스키를 다뤘다. 람스도르프는 잘생긴 젊은 3등서기관을 크림에 데려갔고, 돌아온 사빈스키는 궁정 시종관 칭호를 받은 뒤 빠르게 2등서기관과 1등서기관으로 올라갔다. 셸킹은 궁정의 농담도 빠짐없이 옮기고 그 출처가 황제의 기함 함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멘(Nikolai Lomen) 제독이라고 밝혔다.
“한번은 독일 황제의 페트로그라드 방문을 기념한 갈라 공연에서 사빈스키가 의전관 임무를 맡았다. 휴식 시간에 니콜라이 황제는 자신의 부관인 로멘 제독에게 말을 건넸다.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황제는 ‘람스도르프 백작부인을 내게 보여 주라’고 했다. 사빈스키를 뜻한 말이었다!”
— 예브게니 셸킹, 『외교의 게임』, 134–135쪽; 우라니아 번역
이런 이야기는 인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1902년 사빈스키는 외무부 직책을 유지하면서 궁정 행사를 진행하는 의전관에도 임명되었다. 훗날 궁정에서 그의 상관이 될 수석 의전관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겐드리코프(Vasily Gendrikov) 백작은 이에 반대했다. 그 뒤 벌어진 일을 폴롭초프는 1902년 4월 14일 일기에 적었다.
“그런 총애 가운데 하나를 두고 겨울궁전 안에 큰 추문이 퍼지고 있다. 몇 달 전 외무장관 람스도르프는 자기 사무국의 비서관인 사빈스키라는 자를 의전관에 임명해 달라고 청했다. 수석 의전관 겐드리코프 백작이 강하게 반대해 람스도르프의 청은 거절되었다. 겐드리코프는 람스도르프와 사빈스키가 비난받을 만큼 은밀하고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황제는 겐드리코프에게 그런 임명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토요일 저녁 7시, 겐드리코프는 궁내장관에게서 사빈스키가 의전관으로 임명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겐드리코프는 즉시 프레데릭스에게 수석 의전관직에서 해임해 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겐드리코프의 이런 행동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오히려 이 슬픈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낱낱이 말했다. 람스도르프가 자신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프레데릭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협했다는 사실까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 알렉산드르 폴롭초프, 일기, 1902년 4월 14일
람스도르프의 인사 방식은 사빈스키 외의 사례에서도 입에 올랐다. 이즈볼스키는 전임자의 인사 체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부하 대다수가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소수의 개인적 친구로 자신을 둘러싼 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을 나눠 주었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회고록』
“마담”이라는 기록을 남긴 지 석 달 뒤 수보린은 이 주제로 돌아왔다. 그가 보기에 국가 공직을 망치는 것들의 목록에 동성애자 고관들을 도둑, 뇌물 수수자, 밀고자와 나란히 올렸다.
“내가 ‘모두를 내 법정과 심판대로 불러내려 한다’는 말은, ‘내 법정과 심판대’가 아니라 여론의 법정과 심판대로 고쳐야 옳다. 또 일반적인 ‘모두’가 아니라 재능 있고 독립적인 사람을 몰아내는 무능한 자 모두, 도둑과 뇌물 수수자 모두, 음모꾼 모두, 거짓 밀고자 모두를 뜻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남성 연인, 곧 남자 애인에게 공직이나 민간 일자리를 주고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로를 그들 자신을 위한 공로와 똑같이 취급하는 일부 남색가까지도……”
— 알렉세이 수보린, 『일기』
람스도르프가 물러난 뒤에도 사빈스키는 자리를 지켰다. 새 장관은 그의 능력과 성실성, 조직에 관한 지식을 높이 샀다. 후원과 역량은 서로 배제되지 않았다. 로푸힌은 새 장관 아래에서 사빈스키의 지위가 오히려 나아졌고, “사빈스키가 성공한 이유를 둘러싼 악성 소문도 잦아들었다”고 썼다.
사빈스키 자신은 여행과 암호 업무, 장관과의 대화를 자세히 묘사했지만 람스도르프의 동성애나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작이 사망한 뒤에는 니콜라이 2세의 명에 따라 그의 문서를 정리해 기록보관소로 넘겼다.
사임과 죽음
제1국가두마가 문을 연 다음 날인 1906년 4월 말, 람스도르프는 외무부를 떠났다. 후임자는 이즈볼스키였다. 니콜라이 2세는 이미 1905년 말 장관 교체의 정치적 이유를 설명했다.
“람스도르프 백작은 구체제의 전형적인 관료이다.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므로 두마 개원 전에 사임해야 할 것이다.”
—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가 전한 니콜라이 2세의 말, 『회고록』
사임은 사생활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고, 문서로 판단하면 오직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벨기에 공사 드 그렐-로지에 백작(Count de Grelle-Rogier)은 1906년 5월 4일, 람스도르프가 물러나기 몇 달 전부터 심장 발작을 일으켜 크게 불안해했지만 의사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백작은 “쉴 새 없는 업무를 줄일 수 없다고 여겼다.”
같은 공사는 백작의 정직함과 충성심, 곧은 성품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극동 정책을 장악한 강력한 파벌”이 그를 배제하지 않았다면 일본과의 전쟁을 피했을 것이라고 썼다. 프랑스 신문 『르 탕』(Le Temps)은 프랑스인들이 물러나는 장관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만을 품을 수 있다”고 평했다.
람스도르프는 황제가 직접 고위 관료를 지명하는 상원인 국가평의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06년 여름에도 예년처럼 니콜라이 2세는 그가 옐라긴 궁전 서쪽 절반을 쓰게 했다. 복무의 대가로 성 블라디미르 훈장 2등급,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등급, 성 안나 훈장 1등급, 백수리 훈장,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을 받았다.
사빈스키는 람스도르프의 건강이 사임 뒤 악화되었고 그 자신도 “정신적으로 짓눌렸다”고 썼다.
“람스도르프 백작은 자신의 정직함과 군주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 때문에 희생되었다.”
— 알렉산드르 사빈스키, 『러시아 외교관의 회고록』
중병에 걸린 람스도르프는 1906년 12월 4개월 휴가를 받고 1907년 1월 치료를 위해 이탈리아 리비에라로 떠났다.
1907년 3월 19일 산레모에서 62세로 사망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사인을 심장마비나 협심증으로 보았으며, 백작은 서재에서 발견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렌스크 루터교 묘지에 묻혔다.

제국의 외교 정책을 6년 동안 지휘한 사람은 황제가 뒤에서 “마담”이라고 부른 동성애자였고, 상층부에서는 알아야 할 사람이 모두 이를 알았다. 그렇다고 형사 처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형사 및 교정 형벌 법전』 제995조는 “남색”, 곧 남성 간 성행위에 권리 박탈과 구금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농민과 노동자, 도시 빈민에게 닿았을 뿐 관등과 작위를 지닌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제국의 정상부에서 동성에 대한 끌림은 드물지도, 경력의 장애도 아니었다.
람스도르프의 생애는 동성애가 진실한 신앙과 우익 성향에 양립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고정관념도 무너뜨린다. 백작은 정교회 신자였고 여름을 수도원에서 보냈으며 크론스타트의 요한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왕권신수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성들과 연애 관계를 맺었다.
러시아 LGBT 역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그를 자기 역사의 인물로 당당히 꼽을 수 있다. 람스도르프는 발칸에서의 전쟁과 영국과의 전쟁을 막았고, 양심을 복종보다 앞세워 전제군주와 논쟁했으며 자선단체들을 후원했다. 그는 제국에 정직하게 봉사했고, 그를 싫어한 사람들조차 그 정직함은 부정하지 않았다.
문헌 및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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