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헌공은 어떻게 미소년을 보내 우나라 조정을 약화하고 나라를 정복했나
고대 중국에서 남총을 외교 책략에 이용한 역사적 일화.
목차

고대 중국 문헌 『전국책(戰國策)』에는 교묘한 외교 책략을 구사한 진 헌공(晉獻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경쟁자의 측근에 매력적인 젊은 남성을 들여보내 상대를 흔드는 계책이었다.
『전국책』은 중국이 통일되기 전, 여러 나라가 각축하며 복잡한 외교를 펼치던 기원전 5~3세기의 역사를 다룬 문헌이다. 군주와 책사, 외교관 등 실존 인물의 것으로 전해지는 연설과 일화, 대화, 서신을 모았다.
진 헌공은 누구이며, 진나라는 그의 치세에 어떻게 강해졌나
진나라는 중국이 수많은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던 춘추 시대에 존재했다. 제후국들은 형식적으로 주 왕실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인 정치를 펼쳤다.
진나라는 황허 북쪽, 주로 오늘날의 산시성 일대에 자리했다.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다투는 가운데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 군사·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진 헌공은 기원전 676년부터 651년까지 26년간 재위하며 진나라의 세력 확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즉위 초 군제 개혁을 단행했고, 재위 5년째에는 변경의 유목 집단인 여융(驪戎)을 격파했다. 이어 경(耿)·곽(霍)·위(魏) 등의 나라를 정복하고 융적(戎狄)도 복속시켰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영토에 병합된 나라가 17개, 진나라에 종속된 나라가 38개에 이르렀다.
이 사건들이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는 다른 지역의 연대와 견주면 실감할 수 있다. 헌공의 치세는 아테네의 드라콘 법전보다 수십 년 앞서며,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로마 건국 연대보다는 약 한 세기 뒤다. 같은 무렵 근동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강성했고, 이집트에서는 제26왕조인 사이쓰 왕조가 헌공의 치세 중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652년경 진나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듬해 헌공이 중병 끝에 죽자, 어머니가 서로 다른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왕위 계승 후보들이 살해되고 복잡한 음모가 이어졌다.
헌공은 군사력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로도 세력을 키웠다.
정치적 압박의 수단이 된 미소년
헌공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 가운데 하나는 괵(虢)나라와 우(虞)나라에 얽힌 이야기다. 괵나라는 진나라의 국경을 위협했지만, 진나라에서 괵나라로 가려면 그 동맹국인 우나라의 영토를 지나야 했다.
책사 순식(荀息)의 조언에 따라 헌공은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괵나라 군주에게는 미녀들을, 우공(虞公)에게는 잘생긴 젊은 남성을 보냈다. 이 청년의 임무는 우공의 신임을 얻어 판단을 흐리는 것이었다. 우공이 여성보다 남성을 더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책』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헌공은 우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궁지기(宮之奇)를 두려워했다. 순식이 말했다. “『주서(周書)』에 ‘미남은 노신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우공에게 용모가 고운 소년을 보내 궁지기를 모함하도록 시키십시오. 그러면 궁지기의 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그는 달아날 것입니다.” 헌공은 이 계책을 쓴 뒤 우나라를 공격해 점령했다.
동시에 괵나라 국경에서는 충돌을 유도하는 도발이 벌어졌다. 헌공은 이를 진나라가 받은 모욕이라고 내세워 괵나라를 응징하겠다며, 우공에게 군대가 우나라 영토를 지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순식은 옥과 명마를 선물로 들고 우나라에 가서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나라 신하들은 모두 우공을 만류했지만 뜻을 꺾지 못했다. 문헌은 그 이유를 미소년의 영향력에서 찾는다. 허락을 얻은 진나라 군대는 기원전 658년 괵나라를 침공했고, 기원전 655년 겨울 마침내 괵나라를 멸망시켰다.
궁지기는 이 이야기에서 우나라의 현명한 신하다. 그는 괵나라가 망하면 다음 공격 대상은 우나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공이 이를 무시하자 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궁지기는 일족을 데리고 몰래 우나라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는 실제로 우나라도 정복했다.
그전에 헌공은 우나라를 몇 차례 더 이용했다. 괵나라 정복이 진나라에 유리하게 진행되자 우공은 이를 막기는커녕 침공을 도왔다. 반란을 일으킨 부족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자기 군대를 보내 하양관(下陽關)을 장악한 뒤 진나라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괵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그곳에서 빼앗은 보물의 일부를 받았다.
이후 진나라 장수는 ‘휴식’을 명목으로 우나라 수도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며칠 뒤 우공은 헌공이 이미 성벽 앞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마중 나간 우공에게 헌공은 산으로 사냥을 가자고 제안했다. 여전히 궁정에 들어온 남총(男寵)의 영향을 받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우공은 환대의 뜻을 과시하듯 수도를 지키던 병력을 거의 모두 이끌고 사냥에 나섰다.
사냥 도중 한 신하가 도성에서 소요가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우공이 도성 밖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진나라 군대가 수도를 점령한 뒤였다. 우공도 붙잡혀 진나라로 끌려갔고, 우나라는 멸망했다.
이 일화는 고대 중국 궁정과 관료 사회의 동성 간 욕망이 『전국책』 같은 문헌에 기록될 만큼 눈에 띄는 현상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계책이 성공했다는 서술은 총애받는 남성이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겨졌는지 보여준다.
순식은 이때 널리 알려진 “미남은 노신을 무너뜨리고, 미녀는 말 잘하는 이를 무너뜨린다(美男破老,美女破舌)”라는 말을 인용한다. 이 표현이 반드시 동성애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의 대상인 남성과 여성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을 향한 욕망이든 사람의 판단을 흐려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일화는 훗날 한 나라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치는 계책인 ‘가도벌괵(假道伐虢)’의 사례로 『삼십육계』에 수록되었다. 이는 중국의 정치 전통이 외교적 책략과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준다.
문헌 및 출처
- 브렛 힌시(Bret Hinsch), 『절단된 소매의 열정(Passions of the Cut Sleeve)』,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