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 남긴 복숭아’: 위 영공과 미자하의 고대 중국 궁정 동성애 이야기
군주의 편애를 경계한 법가의 우화가 어떻게 남성 간 사랑의 은유가 되었는가.
목차

기원전 6~5세기 중국 위(衛)나라의 군주 위 영공(衛靈公)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그를 말할 때 젊은 남성 미자하(彌子瑕)와의 관계를 더 자주 떠올렸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서 나온 ‘먹다 남긴 복숭아’, 곧 여도(餘桃)는 중국 문화에서 남성 간 사랑을 가리키는 표현이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거듭 전해지고 논의되며 다양하게 해석됐습니다.
영공과 미자하의 이야기
위 영공과 미자하의 이야기는 철학서 『한비자(韓非子)』에 전합니다. 책 이름은 기원전 4~3세기의 사상가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韓非)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법가는 국가를 군주 개인이나 다른 누구의 호오와도 무관하게 권력과 법, 형벌로 움직이는 엄격한 체계로 보았습니다. 『한비자』에는 군주와 관료를 위한 교훈적 일화가 다수 실려 있습니다.
「세난(說難)」 편은 영공이 한때 측근 미자하를 총애했다고 전합니다. 미자하는 궁정에서 출세해 군주 곁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던 듯합니다. 학계에서는 그를 반전설적 인물로 봅니다. 실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이야기 밖에는 믿을 만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비는 두 가지 일화를 듭니다. 첫째, 미자하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리자 밤중에 누군가 몰래 궁에 들어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장 어머니에게 가고 싶었던 미자하는 군주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영공의 수레를 타고 나갔습니다. 위나라 법에서는 군주의 수레를 허락 없이 쓰면 발을 자르는 월형(刖刑)에 처할 만큼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영공은 미자하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형벌도 잊었으니 참으로 효성스럽다며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둘째, 미자하는 영공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유난히 달게 느껴지자 한입 베어 먹고 남은 것을 영공에게 건네 함께 맛보게 했습니다. 영공은 감동해 말했습니다. “나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 자기 입맛도 잊고 맛있는 것을 내게 주려 하는구나!” 유명한 여도, 곧 ‘먹다 남긴 복숭아’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어 한비는 군주의 총애가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젊음과 옛 매력을 잃자 영공의 마음도 식었습니다. 미자하가 다시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듣자 영공은 과거의 일을 정반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전에 수레를 훔쳤고, 먹다 남긴 복숭아를 군주에게 주는 무례까지 저질렀다고 비난했습니다.
한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군주의 사랑을 받을 때는 의심스러운 행동조차 미덕으로 보이지만, 사랑이 식거나 미움을 사면 똑같은 행동이 죄와 결함의 증거가 됩니다.
후대에는 중국의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됐고, 여도는 남성 간 동성애를 뜻하게 됐습니다. 미자하라는 이름도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미소년을 가리키는 비유로 쓰였습니다.

한비는 왜 이 이야기를 썼는가
한비의 목적은 사회 풍속을 조사하거나 동성 관계를 평가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관심사는 군주의 사적인 애착이 권력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였습니다. 법가 사상가인 한비는 군주가 공정해야 하며, 개인적 애착은 질서를 깨뜨리고 권력을 취약하게 하므로 위험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공과 미자하의 이야기는 편애가 정치적 위협이 되는 사례로 쓰입니다. 군주가 특정 총신에게 거듭 특권을 주면 정치는 법과 공적이 아니라 사적인 친밀감에 좌우됩니다. 법가의 관점에서는 권력이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한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성적 지향이 아니라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로 묘사합니다. 고대 중국과 고대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접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동성애’를 개인 내면의 심리적 특성으로 보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비와 다른 주나라 문헌에는 현대의 ‘동성애자’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습니다. 대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총애와 후원을 뜻하는 총(寵)을 말했습니다. 성적 친밀감이 포함될 수 있었지만 관계를 규정한 것은 무엇보다 위계와 의존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성애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관계로 동성 간 유대를 설명하는 경향은 중국 문화에서 여러 세기 이어졌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서양 학문과 의학의 영향으로 동성 간 욕망을 인격 유형이나 성적 지향으로 설명하는 새 용어가 중국어에 들어왔습니다.
한비가 미자하를 호의적으로 그렸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미자하는 병든 어머니를 찾아가려고 위험을 무릅씁니다. 복숭아 일화에서는 애정 깊고 진실하며 사심 없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타고난 타락 같은 것은 그에게 부여되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진 까닭도 미자하의 행동이 아니라 영공의 변덕과 신의 없음에 있습니다.
암울한 결말은 당시 역사·철학 문헌의 전반적인 문체와 맞으며, 그 자체가 동성 관계에 대한 비난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비극적 결말이 이 이야기를 기록할 만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한비는 다른 대목에서도 동성애를 죄악이나 기이한 일, 비난해야 할 것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다른 고대 저자처럼 지나가듯 언급하며 권력에 관한 더 큰 논의를 위한 생생한 사례로 삼을 뿐입니다.
중국 문화 속의 미자하
처음에 영공과 미자하의 이야기는 정치적 교훈이었습니다. 신하들에게 군주의 사적인 사랑에 기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후대 중국 문학에서 미자하는 정치적 사례보다 이름난 미소년이자 남성 간 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약 700년 뒤, 535년에 죽은 시인 유준(劉遵)은 「번화응령(繁華應令)」에서 미자하와 관련된 전고를 노래했습니다.
斷袖恩雖重
소매를 자른 은총이 비록 깊어도餘桃愛未休
먹다 남긴 복숭아의 사랑은 그치지 않네.
‘단수(斷袖)’와 ‘여도(餘桃)’는 이미 궁정의 유명한 남성 간 사랑 이야기와 연결된 문화적 암호였습니다. 교양 있는 독자라면 곧바로 뜻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동성애를 다룬 양나라의 또 다른 유명한 시 「연동(孌童)」은 양 간문제가 지은 것으로 전합니다. 그는 매화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로 잘 알려졌지만, 사랑하는 소년을 찬미한 이 시도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됩니다.
孌童嬌麗質
사랑스러운 소년, 어찌 그리 곱고 아름다운가踐董復超瑕
동현을 지나 미자하마저 뛰어넘는구나……
이런 글에서 미자하의 이름은 누구나 알아보는 전고가 됐습니다. 동성 간 성행위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현존 중국 문헌인 백행간(白行簡)의 『천지음양교환대악부(天地陰陽交歡大樂賦)』도 유명한 사례를 열거하며 “미자하는 군주 앞에서 복숭아를 나누었다(彌子瑕分桃於主前)”고 썼습니다.
12세기 무렵에는 남성 총신이 제후나 황제의 궁정에서 대체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미자하라는 이름도 총애받는 궁정 신하보다 보통의 남창과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회 규범과 언어도 변했습니다. 청나라 때 성 역할이 더 좁게 규정되고 서양에서 들어온 동성애 혐오적 태도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여도를 언급하는 일은 금기가 됐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미자하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위 영공
위 영공은 춘추 시대, 곧 기원전 제1천년기 전반의 작은 제후국 위나라 군주였습니다. 이름은 원(元)이었고, ‘영공’은 본명이 아니라 작위와 시호를 합친 호칭입니다. 공(公)은 제후의 작위이며 영(靈)은 사후에 그의 치세를 평가해 붙인 시호입니다.
재위 기간은 대체로 기원전 534~492년으로 봅니다. 명목상 주 왕실이 천하의 으뜸이었지만, 실제로는 수십 개의 사실상 독립적인 제후국이 전쟁과 동맹을 거듭하던 시기였습니다. 위나라는 강대국은 아니었으나 역사가 오랜 나라였고, 오늘날 허난성 북부 일대에 있었습니다.
영공은 위나라가 혼란한 때 권력을 잡았습니다. 재위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측근 일부가 일으킨 반란입니다. 영공은 한동안 달아났다가 돌아왔지만, 복귀한 뒤에도 책임자를 모두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사서에는 그의 아내 남자(南子)를 둘러싼 갈등도 자세히 나옵니다. 영공의 아들은 어머니를 미워해 죽이려 했으나 음모가 실패하자 다른 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영공이 죽은 뒤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손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영공은 같은 시대를 살며 자신의 원칙에 따라 다스릴 군주를 찾던 공자와의 인연으로도 기억됩니다. 영공이 군대의 진법을 묻자 공자는 자신이 찾던 군주가 아님을 깨닫고 군사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며 에둘러 답했습니다. 이후 다른 제후국으로 떠났습니다.
영공은 42년간 재위한 뒤 기원전 492년에 죽었습니다. 위나라는 점차 쇠퇴하다가 강대국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문헌 및 출처
- 브렛 힌시(Bret Hinsch), 『절단된 소매의 열정(Passions of the Cut Sleeve)』,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