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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국인 성과학자 리시우통의 연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파트너는 시대를 앞서갔다

브르노에서 열린 세계성개혁연맹 대회에서의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와 리시우통(1932년). 사진: Wellcome Collection / JonnyNord (CC BY 4.0)
브르노에서 열린 세계성개혁연맹 대회에서의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와 리시우통(1932년). 사진: Wellcome Collection / JonnyNord (CC BY 4.0)

2026년 10월 역사학계와 성과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중국계 캐나다인 성과학자 리시우통(Li Shiu Tong / 李兆堂, 1907~1993)의 학문적 유산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그가 전 세계에서 기록한 인간 성 다양성에 관한 관찰 연구는 현대 과학의 결론을 수십 년 앞선 것이었다. 오랜 기간 리시우통은 자신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독일의 선구적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가 남긴 원고는 동성애와 양성애의 보편성에 관해 획기적인 통찰을 제시했다.

미국 매체 LGBTQ Nation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24세의 의대생이었던 리시우통은 1931년 상하이에서 세계 순회강연 중이던 63세의 히르슈펠트를 만났다. 리시우통은 동아시아와 미국 순회 여정에서 조수이자 여행 동반자로 동행했으며, 두 사람은 곧 깊은 정서적·학문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베를린 성과학연구소가 파괴되자 히르슈펠트는 귀국하지 못하고 리시우통과 함께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히르슈펠트는 1935년 작성한 유언장에서 리시우통과 동료 활동가 카를 기제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인이자 연구 아카이브의 관리자로 지정했다.

수십 년 동안 학계에서는 니스에서 히르슈펠트가 사망한 후 리시우통이 성과학 연구를 중단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베를린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협회의 공동 설립자인 랄프 도제는 1994년 밴쿠버의 쓰레기통에서 지역 주민 애덤 스미스가 건져낸 유품을 추적해 찾아냈다. 여기에는 히르슈펠트의 데스마스크와 장서, 리시우통의 미발표 수기 초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저서 Racism and the Making of Gay Rights(2022)를 집필한 워싱턴 대학교의 역사학자 로리 마호퍼 교수는 리시우통이 수십 년간 여러 대륙을 오가며 성행동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설명한다. 수기에서 리시우통은 전체 인구의 약 40%가 양성애적 성향을, 20%가 동성애적 성향을, 30%가 이성애적 성향을 보이며, 나머지 10%는 기타 성적·젠더 다양성에 해당한다고 추산했고, 트랜스젠더 정체성 역시 인간 경험의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요소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견해는 동성애를 타고난 생물학적 변이로 보면서도 비교적 드문 현상으로 여겼던 히르슈펠트 자신의 시각과 큰 차이가 있었다. 리시우통의 통찰은 1940년대 후반 알프레드 킨시의 보고서와 성의 유동성에 관한 현대적 이론을 크게 앞선 것이었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엄밀한 통계 방법론이 남아 있지 않고 리시우통이 주로 접했던 환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해 수치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마호퍼 교수는 20세기 중반의 인종적 편견과 서구 중심주의로 인해 서구 사학계가 리시우통을 독자적인 연구자가 아닌 단순한 조수로 치부해왔다고 비판했다.

마그누스 히르슈펠트(1868~1935)는 세계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 조직인 ‘과학인도주의위원회’와 베를린 성과학연구소를 설립한 저명한 독일 의사다. 리시우통은 히르슈펠트 사후 빈, 취리히,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외교 분야에서 일한 뒤 캐나다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3년 세상을 떠났다.

앞서 «우라니아»는 초기 유럽 성과학과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20세기 초 지성계에 미친 영향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러시아 퀴어 역사 기사에서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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